미국 조지아주애틀랜타에 위치해 있던 야구장으로 다목적 용도로 사용된 구장이었다. 애틀랜타 올림픽 야구 전경기를 이 경기장에서 치뤘다. 과거 MLB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와 NFL 애틀랜타 팰컨스의 홈구장으로 사용했다. 팰컨스는 1992년 조지아 돔으로 홈구장을 옮겼고 올림픽 주경기장으로 사용된 센테니얼 올림픽 스타디움을 올림픽이 끝난 후 터너 필드라는 이름의 야구장으로 개조해 애틀랜타 브레이브스의 새홈구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결국 계획대로 풀턴 카운티 스타디움은 올림픽이 끝난후 1997년 철거해서 현재는 터너 필드의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대표팀은 (쿠바는 어렵지만) 미국과 일본 중 한팀만 잡으면 메달획득은 가능할거라고 판단했지만,[3]
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에 의하면, 올림픽 출국 직전 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허구연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만만해했다고 한다.
최종 성적은 1승 6패로 최하위였다. 대표팀은 이해 대회에서 네덜란드에게 11:3으로 승리한 것이 이 대회 유일한 승리였을 정도로 부진했는데, 당시 제대로 된 야구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이탈리아와 호주에게도 패하며 "아무리 아마추어라지만 너무한거 아니냐!"라는 반응을 얻었다. 이해 대회에도 일본 대표팀과의 맞대결이 있었는데 4대14로 7회 콜드게임을 당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아들였다.
는 메이저리그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6번재로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에 지명된 유망주였고 6이닝 7피안타 2실점으로 한국 타선을 막아내며 승리를 거두었다. 제프 위버가 나머지 3이닝을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막았고 한국 대표팀은 손민한이 수비진들의 실책에 흔들리며 7이닝 6실점(4자책점)으로 패전 투수가 되었다. 타선에서는 4타수 2안타 1홈런을 기록한 강혁과 3타수 2안타 1볼넷을 기록한 진갑용이 유이한 멀티 안타를 치며 활약했다.
페드로 라조와 에두아르도 파레트, 호세 콘트레라스가 소속되어 있던 아마 야구 최강팀 쿠바와 맞붙은 대표팀은 의외의 난타전을 펼쳤고 최종 11:14로 패배했다. 한국 대표팀은 선발 사이드암 전승남을 비롯해 김선우, 오철민, 임선동, 김영수 등 5명의 투수를 투입했으나 김영수를 제외한 모든 선수가 난타를 당하며 실점을 했다. 누구하나 3이닝 이상 투구를 하지 못했다. 반면 타선은 강혁이 4타수 3안타 2타점 1볼넷, 안희봉이 3타수 2안타 3타점 1볼넷 등 진갑용과 백재호를 제외한 선발 공격진이 안타를 기록하며 활약했다.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대표팀은 11:3으로 대회 첫승을 거둔다. 선발로 나온 조진호가 3회를 넘기지 못하고 2실점으로 강판 당했으나 이후에 나온 김영수와 4이닝 1실점으로 막은 전승남이 타선의 지원을 받고 잘 마무리 해서 쉽게 승리했다. 공격에서 5타수 3안타 3타점의 최만호와 5타수 4안타 3타점의 이병규가 이끄는 테이블 세터진이 공격을 이끌며 활약 했다.
일본 유도의 여왕 다무라 료코(결혼후 다니 료코)의 남편으로 유명한 야구선수. 올림픽 당시 .421 4홈런 11타점으로 맹활약 했으며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에도 일본 대표팀에 차출되며 활약했다. 참고로 부인과 자신의 메달(은1개, 동1개)을 모두 합치면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로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있었다.
가 버티고 있었기에 올림픽 당시 대표팀이 가장 주목해야할 경기로 꼽았다. 한국 대표팀은 선발투수 손민한이 1⅓이닝동안 4실점하며 무너졌고 뒤이어 올라온 김선우가 1이닝 6실점(4자책)을 기록하는 등 투수진이 난타당하며 졸전 끝에 7회 4:14 콜드게임 패배를 당했다.
호주와의 경기에서 대표팀은 8:11로 패배했다. 초반 7:0 으로 앞서 있어 쉽게 이길 것 같았으나 4회초 선발 임선동이 흔들리며 대량실점의 빌미를 마련했고 뒤이어 나온 전승남도 불을 끄지 못하며 4회에만 대거 8실점으로 역전을 당해 경기에 흐름을 내주었다. 한국 대표팀은 이날 패배로 대회 최하위를 기록하며 쓸쓸하게 귀국해야 했다.
당시 올림픽에 쏠린 국민적 관심의 여파로 잠실야구장에는 불과 7000여명의 관중들만이 입장하는 흥행참패를 겪는다. 그 이듬해부터 KBO 올스타전은 기존의 서울-부산 격년 개최 방식에서 벗어나 전국의 야구장들을 순회하는 방식으로 변경되었고 이는 2020년대 현재까지도[38]
단, 2020~2021 시즌은 코로나19 여파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못했다.
이어지고 있다.
당시 멤버였던 진갑용은 2013 wbc까지 대표팀에 참여하며 가장 오랫동안 대표팀에서 활약한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그리고 약빤 사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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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마추어 선수들만으로 구성된 마지막 대표팀은, 1998년 7월 이탈리아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 출전한 대표팀이다. 그해 12월 방콕 아시안게임부터는 프로선수들의 국제대회 참가가 허용하면서 실제로 프로선수들이 대표팀의 주축을 이룬다.[2] 임선동은 원래 1996년 2월에 졸업해야 했으나 졸업 이수 학점 미달로 졸업을 하지 못했다. 이와는 별개로 다이에 호크스와의 계약 건으로 올림픽 출전 자격이 되는지를 놓고 논란이 일었다.[3]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에 의하면, 올림픽 출국 직전 대한야구협회 관계자가 허구연에게 이와 같은 말을 하면서 자신만만해했다고 한다.[4] 이탈리아 야구리그 소속의 리미니 베이스볼팀에서 뛰는 선수였다.[5] 1999~2010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며 70승 75패를 기록한 우완투수다. 올림픽 출전 당시는 클렘슨 대학교 소속이었다.[6] 1998~2006년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던 좌완투수다. 올림픽 출전 당시는 샌디에이고 주립대학교 소속이었다. 데뷔 당시 김병현과 애리조나에서 한솥밥을 먹었다.[7] 올림픽 3경기에 나서 3승으로 공동 다승왕.[8] 일본 유도의 여왕 다무라 료코(결혼후 다니 료코)의 남편으로 유명한 야구선수. 올림픽 당시 .421 4홈런 11타점으로 맹활약 했으며 2000 시드니 올림픽, 2004 아테네 올림픽에도 일본 대표팀에 차출되며 활약했다. 참고로 부인과 자신의 메달(은1개, 동1개)을 모두 합치면 금메달 2개, 은메달 3개, 동메달 1개로 총 6개의 올림픽 메달을 가지고 있었다.[9] 올림픽 지역예선도 겸한 대회였다.[10] 특히 1995년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당시는 (그 전까지 에이스였던 91학번 문동환보다) 92학번임선동의 활약이 더욱 돋보였다.[11]퍼스.[12] 우승 일본. 대신 전년도 바르셀로나올림픽 은메달팀인 대만을 2번이나 격파했고, 그 중 한번은 임선동의 1실점 완투승도 있었다.[13]버팔로.[14] 우승 쿠바. 참고로 박찬호가 미국 스카우트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다저스에 입단하는 계기가 되었던 대회이기도 하다.[15]마나과.[16] 우승 쿠바. 결승 쿠바전은 조성민과 임선동이 이어던졌다. 참고로 준결승 일본전에서는 문동환의 완봉승으로 8대0 승리했다.[17] 히로시마 히로시마 시민구장.[18] 우승 일본. 결승 일본전은 91학번 문동환과 92학번 조성민이 이어던졌다.[19] 후쿠오카 후쿠오카 돔.[20] 우승 쿠바. 참고로 쿠바전 당시 조성민의 호투가 있었고, 요미우리 자이언츠 입단 계기가 되기도 한다.[21] 후쿠오카 후쿠오카 돔.[22] 우승 쿠바. 결승 쿠바전은 93학번 손민한과 92학번 조성민이 이어던졌다.[23]쿠라시키.[24] 우승 일본. 참고로 결승 일본전 당시 임선동의 호투가 있었고, 다이에 호크스와의 계약 계기가 되기도 한다.[25]아바나.[26] 우승 쿠바.[27]1994년까지는 91학번인 문동환과 심재학의 맹활약도 함께 있었다.[28] 3대2로 일본 승리. 9회말 시작때까지는 2대1로 한국이 리드했으나 9회말에 역전당한다.[29] 공교롭게도 부진의 시작이 실업팀 현대 피닉스 입단과 맞물린다.[30] 그 과정에서 수비실책도 다수 발생.[31]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 중.[32] 특히 허구연 해설위원이 이러한 점들을 많이 비판했다.[33]경기에서도 지고 매너에서도 지다. 1996년 9월 월간스포츠매거진 <루키>에 게재된 허구연 칼럼 중.[34] 프로 12명, 아마 10명.[35] 프로 17명, 아마 5명.[36] 프로 23명, 아마 1명. 참고로 아마추어 1명의 주인공이 바로 정대현이다.[37]1996년 7월 26일.[38] 단, 2020~2021 시즌은 코로나19 여파로 올스타전이 열리지 못했다.